2026. 5. 31. 20:20ㆍ자작 소설
삐비비빅— 삐비비빅—!
고막을 찢는 듯한 기계음이 정적을 깼다. 아침 6시. 스마트폰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어둠이 가시지 않은 방 안을 차갑게 비췄다.
‘아, 벌써 아침인가. 시간이 왜 이렇게 빨라.’
입술 사이로 눅눅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의식은 여전히 꿈과 현실의 경계 어디쯤을 표류하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팔을 뻗어 익숙한 동작으로 알람을 5분 뒤로 미뤘다.
잠시 후, 다시 울려 퍼지는 알람. 나는 기계적으로 다시 5분을 벌었다.
세 번째 알람이 울렸을 때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지옥 같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서서’ 가야 한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일어나야 하는 거지? 차라리 사바나 초원의 사자가 되고 싶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그 짧은 과정조차 거대한 산을 넘는 것처럼 고단했다.
화장실로 향해 밤새 가득 찼던 방광을 비워냈다. 쏴아아— 쏟아지는 샤워기 물줄기에 멍하니 몸을 맡겼다. 샴푸 거품을 내어 머리를 감고, 면도기로 턱 끝에 돋아난 거친 수염들을 깎아냈다. 마지막으로 비누 거품을 내어 몸 구석구석을 씻어내며, 나는 거울 속의 남자를 보았다.
푸석푸석한 피부, 생기 없는 눈동자. 서른아홉. 내년이면 어느덧 불혹이라는, 인생의 정점이라기엔 너무나 초라한 나이에 진입하는 남자. 정준수였다.
기지바지에 적당히 ‘회사원 티’가 나는 셔츠를 대충 걸쳐 입었다.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늦었다. 나는 서둘러 중앙역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침 공기의 상쾌함 따위는 느낄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오직 하나.
‘제발, 앉아서 가게 해주세요.’
운이 좋았다. 플랫폼에 들어선 지하철에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털썩, 몸을 던지듯 앉으며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내 직장은 서울 구로구의 어느 이름 모를 중소기업. 지하철로 편도 1시간 거리의 그곳에서 나는 연구소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직함은 ‘엔지니어’고 하는 일은 ‘아트웍(Artwork)’이나 ‘샘플 조립’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회로도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 다른 연구원들이 설계해 놓은 회로도를 보고 그대로 배선을 그리는, 일종의 ‘전기 도면 그리는 기능공’에 가까웠다.
말만 연구원이지, 실상은 단순 반복 노동자. 즉, 내게는 ‘직장’은 있었지만, 전문적인 ‘직업’은 없었다.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정식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애사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지하철에서 앉아 오기 위해 선택한 전략적 조기 출근이었을 뿐이다. 오해는 금물이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켰다. 암호를 입력하고 윈도우 로딩 화면이 지나가는 찰나, 화면이 갑자기 차가운 파란색으로 변했다.
[ :(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여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
블루스크린.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또 시작이네.”
어제 설치된 윈도우 패치가 문제인 게 분명했다. 늘 겪던 일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안전모드로 부팅해 패치를 삭제하고 다시 재부팅을 시도했다.
다행히 화면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나는 모니터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됐다! MS 이 녀석들은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업데이트 할 때마다 이 짓거리를 해야 해?”
일찍 온 보람도 없이 30분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늘 딱히 급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업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남은 30분 동안 나는 스마트폰 속 세상으로 도피했다. 커뮤니티의 웃긴 글들을 훑어보며 시간을 때웠다. 나는 현실에선 존재감 없는 말단 직원이지만, 인터넷 세상에선 달랐다. 뉴스나 논쟁 글을 보면 나도 모르게 ‘선비’ 모드가 발동해 훈수를 두기 시작한다.
[이건 국회의원들이 지들 밥그릇 챙기려고 하는 짓이죠.]
[내 나이 마흔 돼 보니, 그렇게 아껴서 열심히 살 필요 없더라고요. 다 부질없습니다.]
내가 남긴 댓글에 ‘좋아요’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세상을 꿰뚫어 보는 솔로몬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 그 가짜 성취감이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낙이었다.
어느덧 오전 9시. 나는 소위 말하는 ‘MZ세대’식 마인드로,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정각에 맞춰 본격적인 업무 모드로 전환했다. 다이어리에 오늘 할 일을 적어 내려가던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준수 씨.”
이상길 과장이었다. 그는 특유의, 언제든 트집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찌푸린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부탁한 아트웍은 다 됐나요?”
예상했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갈구기’ 타임. 나는 최대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어제 다 완성했습니다. 지금 검토해 보시겠습니까?”
이상길 과장의 눈썹이 움찔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끝낸 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래요. 저장 경로 알려주세요.”
파일 위치를 알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나를 호출했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다.
“준수 씨, 대체 경력이 몇 년인데 아직도 신입 티를 못 벗었습니까? 내가 한 천 번은 말한 것 같은데, 전원선 두께는 굵게 잡으라고 했잖아요! 안 그러면 실제 제품에서 선이 타버리거나 끊어져서 못 쓰게 된다고요. 이건 기초 중의 기초인데 매번 검토할 때마다 실수를 하네. 다음번엔 이런 일 없게 하세요.”
‘뭐지… 지난번에 네가 분명히 3mm로 두껍게 하라고 했잖아. 그럼 이제 4mm로 하라는 건가?’
속에서는 이런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논리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계적으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다음에는 더 두껍게 신경 쓰겠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선 두께를 수정하고 저장했다. 그리고 다시 과장에게 보고했다.
이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벌써 10년이다. 그런데도 일은 여전히 낯설고, 매일이 지루하며, 가슴 한구석에는 늘 정체 모를 우울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공무원 시험 공부를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다른 프로젝트의 도면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경영지원본부장이 나를 불렀다. 그의 표정은 이상길 과장의 짜증과는 결이 달랐다. 무겁고, 가라앉아 있었으며, 뭔가 ‘결정된 사항’을 통보하려는 표정이었다.
“정준수 씨, 다름이 아니라… 요즘 반도체 수급 문제로 회사 사정이 많이 어렵습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게다가 이상길 과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준수 씨가 최근 들어 의욕도 없어 보이고 업무 처리도 다소 소홀하다는 평가가 있더군요. 회사 상황과 인사 고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권고사직을 제안하려고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정말 그렇게 됐다.
“대신 6개월 치 급여를 퇴직금과 함께 지급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제안을 받아주겠습니까?”
멍해졌다. 하루아침에 권고사직이라니. 사실 회사 생활에 정이 떨어진 지 오래였고, 월급은 쥐꼬리만 했지만, 막상 ‘버려졌다’는 사실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하게 언짢았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래, 어차피 여기 미래도 없잖아. 집은 더럽게 멀고, 내 인생 낭비하는 기분이었어. 차라리 잘 됐다.’
나는 홧김에, 혹은 정말로 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평소에 이 회사가 저와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내일부터 안 나오겠습니다. 제가 하던 일은 이상길 과장님이 다 꿰고 계셔서 따로 인수인계 할 건 없을 겁니다.”
내 대답에 경영지원본부장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너무나 해맑은, 거의 기뻐 보이는 미소였다.
“좋습니다! 이게 회사나 준수 씨나 서로에게 최선일 겁니다. 현명한 결정 해주셨네요. 퇴직금 정산 등 금전적인 부분은 오늘 내로 깔끔하게 마무리하겠습니다.”
그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회사 어려운 건 알았지만, 직원 자르는 게 저렇게 기쁠 일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도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 애쓰는 가여운 직장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동질감이 느껴졌다.
자리에 돌아온 나는 마지막으로 작별 이메일을 썼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비록 이렇게 떠나지만,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응원하겠습니다.]
6개월 치 월급이라는 꽤 쏠쏠한 보상금이 있었기에 악의는 없었다. 오히려 돈과 자유를 동시에 얻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약 내가 결혼해서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결정 못 했겠지.’
나는 짐을 챙기기 전, 남은 연차 수당까지 꼼꼼하게 정산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나의 10년 직장 생활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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