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3,200원의 기적: 도보 전사의 탄생

2026. 6. 1. 20:29자작 소설

인생의 바닥을 쳤을 때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의외로 명료하다. 슬픔, 분노, 절망 같은 복잡한 감정들은 어느 순간 증발하고, 오직 ‘생존’이라는 원초적인 본능만이 남는다.

강남 한복판에서 아영이에게 ‘공부하는 백수’라는 구차한 거짓말을 내뱉고 돌아온 날 밤,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6개월간의 방종이 만들어낸 괴물이 서 있었다. 턱선은 실종된 지 오래였고, 배는 남산만 하게 튀어나와 티셔츠 밑단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이 꼴로 아영이를 다시 만난다고? 아니, 이 꼴로 면접관 앞에 다시 선다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자존심은 이미 강남역 전신주 뒤에 버리고 왔다. 이제 남은 건 14만 원의 잔액과, 내 몸무게의 10% 정도는 걷어내야 한다는 절박함뿐이었다.

나는 홀린 듯 어제 클릭했던 배달 앱의 ‘커넥터’ 신청 페이지를 열었다. 오토바이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면허는 있지만, 오토바이를 살 돈은커녕 기름값조차 아까운 처지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해온 ‘두 다리’가 있었다.

‘그래, 도보 배달이다.’

돈도 벌고, 살도 빼고. 이른바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돈 줍는’ 일거양득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듯, ‘그냥 걷는 것’과 ‘돈을 받고 걷는 것’ 사이에는 엄격한 진입장벽이 존재했다. 나는 일단 스마트폰을 붙잡고 ‘안전교육’이라는 관문부터 넘어야 했다. 2시간 동안 이어지는 온라인 교육. 내용은 뻔했다. ‘안전하게 운행하라’, ‘교통법규를 준수하라’. 평소라면 하품을 하며 넘겼을 내용이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이것이 새로운 직장으로 가는 ‘입사 교육’처럼 느껴졌다.

교육 이수증을 따내고 나니, 이제 실전 준비물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보온/보냉 가방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대충 시장바구니 같은 거 쓰면 안 되나?’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첫 시도는 이마트 쓱배송 때 받은 커다란 비닐 가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첫 배달 콜이 잡혔다. 메뉴는 라지 사이즈 피자와 콜라 1.25리터 두 병.
가방을 손에 들고 걷기 시작한 지 5분 만에 내 팔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한 손으로 무거운 피자와 콜라를 지탱하며 걷는 모습은 마치 시장에서 짐을 나르는 일꾼 같았다. 무엇보다 불안했다. 혹시라도 가방이 기울어져 피자가 한쪽으로 쏠리기라도 한다면? 고객이 문을 열었을 때 뭉개진 치즈를 보며 내뱉을 욕설을 상상하니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안 되겠다. 장비빨이 필요해.’

나는 남은 잔고를 탈탈 털어, 배달 라이더들 사이에서 ‘명품’이라 불리는 우버 가방을 주문했다. 가격은 무려 8만 원. 잔고 14만 원 중 절반 이상이 날아가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확장 가능 구조로 피자나 도시락 같은 넓은 음식도 거뜬히 들어가고, 무엇보다 어깨에 멜 수 있었다. 특히 어깨끈에 스마트폰을 거치할 수 있는 홀더가 달려 있었다. 마치 경찰이 무전기를 차고 다니는 듯한 그 간지(Kanji). 그것이 내게는 무너진 자존심을 세워줄 유일한 갑옷처럼 보였다.

여기에 자외선으로부터 내 소중한(비록 지금은 푸석하지만) 피부를 보호할 팔토시와 얼굴 가리개, 그리고 눈부심을 방지할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갖췄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백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의 배달 전사’였다. 비록 배가 좀 나왔지만, 장비만큼은 프로 라이더 못지않았다.

드디어 모든 장치를 갖추고 라이더로서의 첫 정식 출근 날. 나는 앱을 켜고 ‘배달 시작’ 버튼을 눌렀다.

띠링—!

첫 콜이 잡혔다.
[픽업: XX 떡볶이 / 도착지: OO 아파트 103동]
[예상 수익: 3,200원]

3,200원. 누군가에게는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이겠지만, 내게는 땀방울로 일궈낸 생애 첫 ‘자력 갱생’의 수익이었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떡볶이 집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몸이었다. 6개월간의 방구석 생활로 인해 내 심폐지구력은 거의 바닥 수준이었다. 떡볶이 집까지 가는 완만한 경사로를 오르는데, 갑자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헉… 헉… 내가… 내가 고작 이 정도로…?’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옆을 지나가는 초등학생이 나보다 더 빨리 걷고 있었다. 수치심이 밀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3,200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떡볶이를 픽업해 아파트 단지로 향하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보온 가방의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하지만 어깨에 멨기에 팔은 자유로웠고, 스마트폰 거치대 덕분에 지도를 확인하는 것도 수월했다.

아파트 10층. 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었다.
내 눈앞에 나타난 ‘계단’이라는 거대한 벽. 나는 잠시 갈등했다. ‘그냥 취소할까?’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지금 다이어트 중이고, 이 계단은 내 지방을 태워줄 최고의 헬스장이다.

“할 수 있다. 정준수! 넌 엔지니어였어! 효율적으로 올라가자!”

나는 스스로를 세뇌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3층쯤 올라갔을 때 다리가 후들거렸고, 7층쯤 이르자 입에서 단내가 났다. 10층에 도착해 벨을 눌렀을 때, 나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배… 배달 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고객이 음식을 받았다. 고객은 땀 범벅이 되어 헉헉거리는 내 몰골을 보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보온 가방에서 정성스럽게 꺼낸 따뜻한 떡볶이를 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수고하셨어요.”

그 짧은 한마디. 회사에서 이상길 과장에게 들었던 “경력이 몇 년인데 아직도 신입 티가 나냐”는 독설보다 훨씬 더 가슴 뭉클한 위로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 스마트폰 화면에 [정산 금액: 3,200원]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나는 멈춰 서서 하늘을 보았다.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나는 배달을 시작하며 스스로 세 가지 철칙을 세웠다.

첫째, 주말과 공휴일 낮에만 한다. (밤에는 위험하고, 무엇보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정면 승부는 낮에 한다.)
둘째, 미세먼지가 좋은 날에만 나간다. (건강해지려고 시작했는데 폐병 걸리면 억울하니까.)
셋째, 빙판길이나 태풍 때는 절대 나가지 않는다. (부러진 다리 치료비가 배달비보다 더 많이 나오면 그것은 마이너스 사업이다.)

철저하게 ‘효율’과 ‘생존’을 중심으로 한 전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내 허벅지가 평소보다 단단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기분 탓이겠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오늘 3,200원을 벌었고, 아마도 300칼로리 정도의 지방을 태웠을 것이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온몸이 쑤시고 발바닥이 화끈거렸지만,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나쁘지 않은데?’

내일은 오늘보다 더 빨리 걷고, 더 많은 콜을 잡으리라.
나는 이제 ‘전직 엔지니어’가 아니라 ‘현직 라이더’ 정준수였다.

물론,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근육통 때문에 침대에서 못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스마트폰을 켜고 다시 한번 잔고를 확인했다.
[잔액: 65,500원]

늘어난 3,200원.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정직하고 값진 돈이었다.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며, 내일 신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배달 라이더로서의 새 삶, 생각보다 짜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