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1. 06:14ㆍ자작 소설
세상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삶의 속도가 0에 수렴했다. 매일 아침 6시,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던 알람 소리는 이제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처음 한 달은 그것이 구원인 줄 알았다. 정오가 다 되어 느지막이 눈을 뜨고, 배달 앱으로 시킨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넷플릭스 시리즈를 정주행하는 삶. 그것은 내가 평생 꿈꿔온 ‘자유’였다.
하지만 자유에는 반드시 비용이 따른다. 그리고 그 비용은 생각보다 훨씬 가혹했다.
“하… 진짜 다 썼나.”
나는 멍한 표정으로 스마트폰 뱅킹 앱의 잔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잔액: 142,300원]
처음 퇴직금을 정산받았을 때 내 통장에는 약 4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찍혀 있었다. 6개월 치 위로금과 퇴직금, 그리고 연차 수당까지 싹싹 긁어모은 금액이었다. 마흔 살 인생에 처음으로 쥐어본 큰돈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마치 젊은 시절의 워런 버핏이라도 된 양 착각했다.
‘잠깐 쉬면서 재정비하고, 그동안 못 샀던 장비도 좀 사고, 가끔 좋은 데 가서 보양식도 먹자.’
그 ‘잠깐’과 ‘가끔’이 문제였다. 나는 내 인생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돈을 썼다.
최신형 게이밍 PC를 맞추고, 평소 갖고 싶었던 고가의 기계식 키보드와 모니터를 샀다. ‘취업 준비를 하려면 장비가 좋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였다. 거기에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술자리,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지른 명품 운동화 몇 켤레, 그리고 무엇보다 ‘어차피 나중에 취업하면 다 메꿀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내 통장을 갉아먹었다.
그렇게 방탕하게 보낸 6개월. 4천만 원이라는 거금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물론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경력직’으로서 이력서를 수십 군데 뿌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인원으로 인해….]
냉혹한 현실이었다. 하드웨어 엔지니어라고는 하지만, 실상 나는 회로도조차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배선 그리는 기계’였다는 사실이 취업 시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0년의 경력은 있었지만, 알맹이가 없었다. 기업들이 원하는 건 ‘설계할 줄 아는’ 엔지니어였지, ‘선 두껍게 그릴 줄 아는’ 작업자가 아니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친구 윤성열이었다.
“여보세요.”
“야, 정준수! 너 아직도 집구석에서 곰팡이 피우고 있냐?”
성열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아니, 정확히는 재수 없게 들렸다. 그는 나와 동갑내기로, 같은 회사원은 아니지만 나름 탄탄한 중견기업에서 과장 직함을 달고 승승장구 중이었다.
“곰팡이는 무슨. 나는 지금 ‘인생의 재충전’ 기간을 갖는 중이다.”
“재충전 같은 소리 하네. 야, 너 권고사직 당한 지 반년 됐다며? 슬슬 기어 나와야지. 오늘 저녁에 시간 돼? 강남 쪽에 괜찮은 고깃집 알아놨으니까 나와. 내가 쏜다.”
‘내가 쏜다’는 말. 평소라면 자존심 상해했을 말이지만, 잔고 14만 원의 내게 그 말은 성경 구절보다 더 은혜롭게 들렸다.
“어, 시간 돼. 어디서 볼까?”
강남역 인근의 고깃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성열이는 이미 도착해 갈비를 굽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나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치 있게 살고 있다’는 특유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얼굴 꼴 좀 봐라. 너 진짜 집에서 잠만 잤지? 피부가 아주 투명해졌어. 거의 유령 수준인데?”
“시끄러워. 너는 여전히 입만 살았구나.”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성열이가 구워놓은 고기를 미친 듯이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최근 며칠간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으로 연명하던 내 위장은 최고급 돼지갈비의 향연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그래서, 취업 준비는 어떻게 돼가냐? 네 전공이면 갈 데 많을 텐데.”
성열이의 질문에 나는 고기를 씹던 동작을 멈췄다. ‘갈 데가 없어서 이 고기를 이렇게 처먹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뭐… 그냥 눈높이를 좀 낮춰서 천천히 찾고 있어. 너무 급하게 가면 또 이상한 회사 들어갈까 봐.”
“하긴, 신중한 게 좋지. 그래도 마흔인데 너무 오래 쉬면 감 떨어진다. 필요하면 내가 우리 회사 인맥 좀 알아봐 줄까?”
친절함이 때로는 비수가 되어 꽂힌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성열이와 대화를 나누며 나는 깨달았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고 있고, 오직 나만이 멈춰 서서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기가 맛있을수록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섰을 때, 강남의 밤거리는 화려했다. 네온사인과 세련된 옷차림의 사람들. 그 풍경 속에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기분이 들었다.
“야, 커피 한잔 더 할래? 내가 진짜 맛있는 카페 아는데.”
“아냐, 나 내일 일찍 일어나서 공부해야 돼. 먼저 간다.”
거짓말이었다. 내일 아침에 내가 할 일은 아마 11시까지 잠을 자다가 일어나 멍하니 천장을 보는 일일 것이다. 나는 성열이에게 손을 흔들고 서둘러 역 방향으로 걸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길 건너편, 세련된 화장품 편집숍 앞에서 누군가 지인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김아영.
그녀였다. 내가 30대 내내 짝사랑했던, 그리고 지금은 화장품 매매 자영업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소문을 들었던 그녀. 아영이는 예전보다 더 우아해졌고, 입고 있는 옷이나 가방 하나하나가 ‘성공한 여성’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이 타이밍에.
나는 반사적으로 전신주 뒤로 몸을 숨겼다.
‘제발, 나를 보지 마라. 제발.’
지금 내 몰골을 보라. 6개월간의 은둔 생활로 인해 다듬지 않은 수염, 무릎 나온 추리닝 바지에 낡은 티셔츠. 무엇보다 내 눈빛에는 ‘돈 없고 할 일 없는 백수’의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반면 그녀는 빛나고 있었다. 그녀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자신감 넘치는 제스처. 우리는 이제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승 곡선을 그리는 정점에 있고, 나는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추락 중이었다.
그때였다.
“어? 준수 씨?”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전신주 뒤에서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아영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내 추리닝 바지와 덥수룩한 얼굴을 훑었다.
그 찰나의 시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스친 아주 짧은 당혹감과,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동정심’을.
“준수 씨 맞죠? 세상에,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요! 잘 지냈어요?”
그녀가 다가왔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예전 같으면 심장이 터질 듯 뛰었겠지만, 지금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유가 달랐다. 수치심. 거대한 수치심이 해일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다.
“아… 네. 그냥… 그냥 잘 지내요.”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어머, 요즘 무슨 일 하세요? 예전에 다니시던 회사 계속 다니시나 해서요.”
그 질문. 백수에게 가장 치명적인 질문. 나는 입술을 달달 떨며 대답했다.
“아, 그게… 잠시 쉬고 있어요. 개인적인 공부 좀 하느라고.”
‘개인적인 공부’라는 말은 백수들의 공용어다. 아영이는 내 말을 믿는 눈치였지만, 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렇구나. 공부하시는구나. 멋지네요! 아, 제가 지금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 나중에 연락 주세요. 번호 그대로죠?”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시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쪽팔림.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강렬했다.
나는 내 주머니 속에 든 스마트폰을 만져보았다. 잔고 14만 원.
방금 전까지 성열이가 사준 갈비로 배를 채웠지만,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나는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초라했다. 한없이 초라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였다. 4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6개월 만에 탕진한 내 한심함, 경력이라는 이름의 껍데기만 남은 내 무능함, 그리고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비참하게 무너진 내 모습.
나는 가방 속에서 구겨진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적었다.
[돈 벌 방법 찾기. 뭐든 한다.]
엔지니어? 하드웨어? 그런 거 다 집어치워도 좋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직함’이 아니라 ‘현금’이었다. 당장 내일 먹을 밥값과, 다시는 아영이 앞에서 그런 몰골로 서지 않을 최소한의 품위 유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뭘 할 수 있을까. 마흔 살의 무능한 전직 엔지니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 남아 있기는 한 걸까.
나는 멍하니 지하철 노선도를 바라보았다.
그때, 스마트폰 화면에 배달 앱 광고 팝업이 떴다.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누구나 쉽게 돈 버는 배달 라이더!]
평소라면 코웃음을 쳤을 광고였다. ‘대학 나오고 연구소에서 일하던 내가 저런 단순 노동을?’ 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나는 홀린 듯 그 광고를 클릭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막, 혹은 가장 밑바닥으로의 추락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자작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 4화 직선거리 해결해주소 (0) | 2026.06.02 |
|---|---|
| 제 3화 3,200원의 기적: 도보 전사의 탄생 (1) | 2026.06.01 |
| 제 1화 선 두껍게 그리는 엔지니어 (0) | 2026.05.31 |